1. 어린시절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仁達坊) 야주현계(夜珠峴契)에서 어물전과 싸전을 경영하던 잘 나가던 사업가 아버지 방경수(方慶洙, 1879. 7. 10 ~ ?)와 어머니 손성녀(孫姓女, 1873. 9. 4 ~ 1917) 사이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7년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된 인적사항에는 원적지가 한성부 중서 견평방 이문동계 이문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8번지)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후 192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83번지에 거주했습니다.
방정환은 고조부 방우구(方禹矩, 1782. 11. 9 ~ 1841. 11. 7) 때까지 의관, 무관 등을 세습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6대조 방태규(方泰逵, 1735. 7. 18 ~ 1792. 2. 22)는 1762년(영조 38) 식년 의과에 3등 5위로 입격해 영조·정조 시기에 어의(御醫) 및 호군(護軍, 정4품)에 올랐고, 5대조 방효양(方孝良, 1756. 12. 15 ~ 1823. 7. 27)은 순조 때 무관으로 출사해 능마아청 낭청(能麽兒廳郞廳)과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6품) 등을 역임했습니다. 고조부 방우구는 1804년(순조 4) 가인의(假引儀, 종9품)로 출사해 1807년 겸인의(兼引儀, 종9), 1809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1813년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종6품), 1814년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종6품), 1816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 종6품), 소촌찰방(召村察訪, 종6품) 등을 역임했습니다. 비록 증조부 방윤근(方允根, 1842 ~ ?) 대부터는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부 방한룡(方漢龍, 1858. 9. 29 ~ ?) 대부터 상당한 부잣집으로서 집은 큰 기와집 한 채로도 부족해서 두 집을 사서 이어 붙여 만들었을 정도로 엄청 으리으리했고, 또한 하인들도 상당히 많이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금수저로 태어난 방정환은 지역 유지이자 부잣집 아들로서 어릴 때는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들어가 엿, 과자,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간식을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기에 콩고물을 얻기 위한 동네 아이들은 항상 방정환을 따라다녔고, 그 덕에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이었습니다. 또한 그럴 때마다 가게 주인은 방정환의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곤 했습니다.
7살 되던 1905년까지 방정환은 할아버지 방한룡에게서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1905년 작은아버지 방흥수(方興洙, 1897. 3. 5 ~ ?)를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신식 공부를 하는 그 곳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들여다봤다가 당시 학교장이던 김중환 교장을 우연히 만났고, 그에게 이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곳에 입학하려면 먼저 댕기도 자르고 머리도 짧게 깎아야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랬다가는 할아버지한테 크게 꾸중 듣는 것도 모자라 아예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서 약간 망설이다가 이내 용기를 낸 뒤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방정환은 댕기도 자르고 머리도 짧게 깎은 뒤 귀갓길에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보고 몹시 분기탱천할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조금 겁도 냈습니다. 물론 집에 오자마자 이를 본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고,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누가 네 머리를 이 꼴로 만들었느냐고 가장 불같이 화를 냈고, 이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려다가 손자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손자의 뜻을 존중하여 회초리를 내려놓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면서 신식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고, 그렇게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습니다. 9살 때이던 1907년, 집안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가고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부유했던 집은 한순간에 가난해지면서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고, 계모 해주 오씨 오애기(吳愛其)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였고, 방정환 본인은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나 꿈에 그리던 신식 공부를 하게 돼서 신났다고 해 놓고는 막상 학교 공부에는 적응을 못 했습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1908년, 불과 10살 나이의 소학생으로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2. 영웅의 발자취
1) 상업학교를 중퇴하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방정환의 정식 등단 시기를 191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이상진 외, 한국근현대문학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1913년 관립미동보통학교(現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학교(現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했습니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방정환이 공부를 계속 하길 바랐으나, 이재승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등이 쓴 '이야기 교과서 인물 방정환'(시공주니어)에 의하면 몹시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선린상업학교에서의 공부는 방정환이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현실은 조선은행(한국은행) 서기와 같은 금융 노동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면의 갈등이 심했던 것입니다.
방정환은 훗날 "만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금융 노동자와 아동문학가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습니다. 만일 담임교사와 부친의 바람대로 금융 노동자가 되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데 억지로 해야 하다니...", "아동문학가가 되고 싶은데 생활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갈등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소파 방정환 평전인 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을 쓴 민윤식 작가는 추정하기를, 방정환이 학교를 그만 둔 이유로는 공부가 본인과 안 맞아서가 아니라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그만 둔 것이라는 것을 실질적인 이유로 추정합니다.(민윤식(2023),<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스타북스)
이후 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해 서류 필사 업무를 했는데, 일급으로 임금을 계산하여 1달에 1번 지급받았습니다. 사직 후에 그 곳에서 함께 일하면서 친해진 류광렬과 함께 문학을 토론하고,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머물기도 했습니다. 또한 1918년,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 손용화와 중매결혼했으며,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습니다.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현재의 고려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또한 넉넉한 장인 덕에 집안 형편도 차츰 나아졌습니다.
2) 3.1 운동 이후 어린이 사업에 뛰어듬.
1920년 ~ 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습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습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습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자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습니다.
다작을 번역하면서 본인이 소설도 많이 썼습니다.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등등 여러 가명을 썼는데, 이는 잡지사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정환은 또한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 1920년대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문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21년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상하 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 후로도 '아기별 삼형제' 등의 동요를 짓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 등을 집필했습니다. 외국 동화도 계속 번역했고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시골인 경상남도 양산시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방정환이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방정환 스스로도 '신데렐라' 동화구연을 하고 나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고등계 형사도 최루성 동화구연에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자지러지게 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그놈이 내지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3. 업적
어린이날의 창시자인 방정환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방정환은 아래와 같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 문학 활동: 방정환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청춘 잡지에 글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문학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했으나 가난한 가정 환경으로 고민하였습니다.
2) 사회 운동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하여 문학 활동과 노동자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또한 천도교 제3대 교주의 딸과 결혼하여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3) 어린이 문학가: 방정환은 어린이 문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3년에는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여 어린이 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동화구연을 통해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어린이 교육에 열정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4) 정부로부터의 인정: 방정환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 등 그의 활약이 국가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