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의 마리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와르샤와(Warsaw)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폴란드의 명문가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자라던 어린 시절, 그녀의 모국 폴란드는 러시아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안고 자란 마리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과학자의 꿈을 키워 나갔어요. 폴란드사람들이 교육받으면 독립 운동을 일으키려 할 것을 염려한 러시아는 폴란드 사람들의 교육에 제한을 많이 두었지만 그럴수록 마리는 폴란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싶었던 그녀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곳 프랑스도 그녀가 공부하고자 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접근이 남성들에 비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2. 프랑스 학자와의 결혼과 노벨상 수상
그녀는 파리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하였으며, 여기서 동료로서 후에 그녀의 인생을 함께할 애드리앙 쉬로더(Adrienne Pierre Curie)와 만났습니다.
1895년, 마리는 애드리앙 쉬로더와 결혼하였고, 폴란드식 이름인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에서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라고 바꾸게 되어 마리 쉬로더-퀴리(Marie Skłodowska-Curie)로 이름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함께 라디오 활성물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1898년에 라듐이라는 원소를 발견했습니다. 이후, 1903년에는 이 발견으로 인해 퀴리 부부와 앙리 베케렐(Henri Becquerel)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어서 마리 퀴리는 1911년에는 화학상을 수상하여, 노벨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이론적인 성과와 실험적인 연구 결과 양쪽에서 노벨 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입니다.
3. 건강의 악화 및 업적
마리 퀴리는 그녀의 연구와 공헌에 대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서 건강에 영향을 받았고, 결국 방사능 중독으로 인한 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딸 이렌도 방사능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마리와 같은 백혈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라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시, 몸속에 총알이 박힌 군인들을 라듐을 이용한 엑스선 기계로 살려내기도 하고 암 세포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방사능은 매우 위험하기도 하나, 우리 생활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 방사능을 감자나 딸기 같은 식품에 쬐어 주면 오랫동안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고,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기계를 검사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 몸속을 들여다보거나 몸속에 자란 암세포를 죽일 수도 있지요. 이 밖에도 방사능은 여러 곳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힘들게 발견해 낸 이 라듐을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알려주어 라듐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만들어 쓸 수 있게 한 퀴리 부부! 마차 사고로 남편 피에르가 먼저 사망했지만, 남편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끝까지 연구에 매진하고 소르본 대학교 첫 여성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 그녀의 과학 사랑은 과학의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성 과학자로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업적은 오늘날도 여성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과학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